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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 가운데 풍성히 하라

       


       

        이해인 수녀는 성서와 함께라는 시에서 성서를 내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이 갈피마다 살아 있고, 내가 듣고 싶은 주님의 음성이 가장 가까이 들려오는 생명의 책이요, “하느님과 이웃과 나를 깊이 들여다보는 은총의 거울이라고 읊조립니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메마른 내 가슴에 맑은 물이 고여 오()”, “읽으면 읽을수록 차가운 내 마음에 따스한 물이 고여 오는 성서라고 찬양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는 성서와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루의 문을 (열고)” 그리고 성서와 함께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의 문을 닫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경건하고자 하는 모든 신자는 성경으로 하루의 문을 열고, 성경과 함께 하루 종일 산책을 하고, 성경으로 하루의 문을 닫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바로 초대교회부터 12세기까지 내려온 수도승들의 일상처럼 말입니다. 베네딕트 규칙서가 보여주듯이 수도승생활은 성경을 읽고, 성경으로 기도하고, 일을 하면서 성경을 묵상하고, 심지어는 식사를 하면서도 성경을 듣는 성경과 함께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과 함께 하는 삶을 수도승들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일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특정 장소와 특정 언어에 갇혀 있던 성경을 출애굽시켜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수도원의 담을 헌 루터는 세상을 수도원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해방만을 만끽하는 자유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수도승의 삶을 짊어지는 더 깊은 차원의 자유가 신자에게 요청되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읽기에도 그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너희 가운데 풍성히 하라”(3:16)는 말씀에 따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더 이상 수도승들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신자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수행해야 하는 일상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이것이 개신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 배경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전통을 이어받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운동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 운동을 돕는 좋은 책들과 묵상집도 많이 있습니다.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일들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 자체가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예레미야처럼, 에스겔처럼, 밧모섬의 요한처럼 성경을 먹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먹은 예레미야에게 주님의 말씀은 기쁨이 되었고, 그의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15:16).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먹고 배에 넣고 창자에 채우자 에스겔에게 그 말씀은 꿀처럼 달았습니다(2:8-3: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루마리를 받아먹은 밧모섬의 요한은 그 말씀의 단맛과 쓴맛을 경험하였습니다(10:8-10).

        ‘성경을 먹는다!’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잠깐 이현주 목사님이 쓴 책이란 모름지기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나는 가끔 요리책을 본다.

      그러나 나의 요리책이

      감자탕이나 북어국으로

      꽃을 피우는 일은 거의 없다.

       

      아내도 가끔 요리책을 본다.

      아내의 요리책은

      곧장 밥상으로 올라가

      콩나물밥이나 동태찜으로 태어난다.

       

      책이란 모름지기

      나처럼 읽지 말고

      아내처럼 읽을 일이다.

      눈으로만 읽지 말고

      손발로 읽을 일이다.

       

        성경읽기와 관련해 좋은 통찰을 주는 시입니다. 성경을 읽되 감자탕과 북어국으로 꽃을 피우는 읽기, 눈으로만 읽지 않고 손발로 읽어 콩나물밥과 동태찜으로 태어나게 하는 읽기, 이런 성경읽기가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밧모섬의 요한이 말하는 성경을 먹는 읽기입니다.

        이런 성경읽기는 칼 바르트가 말한 바와 같이, “성경 안에서 한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하는 읽기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르트의 말로 표현하면 역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고, 종교도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성경읽기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생각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읽기에 우리가 어떻게 다가가야 하고, 성격묵상을 통해 어떻게 기도로 나아가야 하는 지 한 가지 길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그러한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이성이 성령의 조명으로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전에 드리는 겸손한 기도는 성경의 문자가 알려주는 차원을 넘어 그 문자를 기록하게 하신 영의 생각을 읽어내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첫 걸음입니다.

        성경읽기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도의 자리가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은 내 생각을 읊조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내뱉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묵상에서 나오는 기도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리는 말씀으로 자신을 반추하며, 여기에서 나오는 내면의 탄식이나, 환희나, 마음의 지향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이것이 깊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속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과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대화를 듣게 됩니다. 분명 입으로는 내가 기도하고 있는데, 내 이성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대화가 오고갑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들으며 놀라기도 하고, 가슴을 치기도 하고, 말할 수 없는 기쁨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관상기도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묵상한 본문의 뜻을 한 문장이나 한 단어로 요약하여, 그것을 되뇌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말씀만 붙들고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바쁜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일과 일 사이에 침묵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이 비교적 짧은 시간이기에 성경을 읽는 것보다는 이미 묵상한 말씀 중 한 문장이나, 한 단어로 요약한 것을 끄집어내어 되새김질하는 것입니다. 이동 시나, 잠자리에 들기 전의 시간도 이런 반추를 할 수 있는 좋은 묵상의 시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루 종일 말씀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묵상한 말씀을 한 문장이나 한 단어로 묶어낸다고 할 때, 그것은 말씀에 대한 나의 느낌이나 생각을 요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영적인 직관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고, 자신의 삶을 말씀으로 체화(體化)시키고자 할 경우 이것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다가오시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그 말씀에 대한 나의 생각이나 느낌에만 머물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보다 깊은 말씀의 사람으로 우리를 성숙시키는데 장애가 됩니다. 때문에 텍스트를 기록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주어진 본문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를 읽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독서와 묵상은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수행되어야 합니다. 때론 앞뒤 본문과 비교하며 읽어야 하고,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성경을 이렇게 읽고 묵상할 때, 실은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는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성경읽기는 성경이 나를 읽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묵상한 말씀을 한 문장이나 한 단어로 요약하여 그 의미를 음미하다 보면, 말씀의 뜻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순간 일체의 생각이 중지되고 말씀의 현장 속으로 끌려가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나의 현실이 말씀 속의 현실이 되어 주님의 마지막 만찬 석상에 있는 제자가 되기도 하고,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는 삭개오가 되기도 하고,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을 잉태하는 마리아가 되기도 합니다. 그곳에 머물며 말씀의 단 맛이나, 쓴 맛에 취하게 됩니다. 이것 또한 관상의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관상(觀想)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전통에서 말하는 관상은 말씀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만물을 바라본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관상은 골방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과 눈이 분노로 가득 찰 수도 있습니다. 탄식의 연속일 수도 있습니다. 긍휼하심으로 가득 찰 때도 있습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운 미소로 충만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꽃을 피우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묵상의 자리는 나의 일상과 세상이라는 정원을 거룩하게 가꾸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 자체가 말씀묵상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이런 말씀묵상과 기도의 한 가지 예를 루터를 통해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단지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유일한 모범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단초로만 제공되는 것입니다. 그럼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묵상하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예를 들면 만일 당신이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대충 훑어만 읽어도 비록 차가운 말이기는 하지만, 이 말의 문자적 의미로부터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잠깐 멈춰서 문자적 발음이 말해주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의미가 나타난다. ‘네 손이 살인하지 않을지라도 네 자신이 살인을 행한다.’ 하지만 여기서 라는 말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당신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안에서 당신은 역시 여러 개의 힘들을 가지고 있는데 손, , , 마음, 그리고 의지 같은 것들이 이런 것들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살인의 금지명령을 들었을 때 손으로 하는 살인이나 혀로, 혹은 욕심으로 말미암은 살인도 역시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이러한 지체 중에서 어느 한 가지가 죄를 범했더라도 그것은 당신이 죄를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화를 내거나 심술궂게 행하지 말아야 하며, 또는 욕설과 중상을 하지 말고 외면하거나 비웃거나 상처 입히지 말아야 하며, 남을 해치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와 반대로, 당신은 사랑해야 하며, 축복해야 하며, 선을 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 진실로 의미하는 것이 당신의 이웃에게 화내거나 가혹하게 하지 말고,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당신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사랑과 관용과 우애와 착한 마음과 친절, 그리고 자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런 내용들을 함께 생각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율법을 즐겨 외우고 명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규정을 묵상하는 자가 곧바로 깨닫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문자적인 의미입니다. 묵상이란 이 문자적인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와 표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속 깊은 데까지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것을 잠깐 멈춰서 문자적인 발음이 말해 주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문자 속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던지게 되는 질문은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입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질문으로, 루터는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인간은 영혼과 몸을 가진 전인적인 인간으로 이해합니다. 이 전인적인 인간은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서 손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혀와 눈과 마음과 의지로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자기 지체 중의 어느 한 가지로도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화를 내거나 심술궂게 행하지 말아야 하며, 또는 욕설과 중상을 하지 말고 외면하거나 비웃거나 상처 입히지 말아야 하며, 남을 해치려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5계명을 마태복음 521-2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빛 하에서 적용하는 루터는 단지 손이나 혀로만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훌륭하고, 달콤하고, 순수하고, 거룩하며, 신비스러운지를맛 볼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차갑게 들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달콤함과 순수함과 거룩함과 신비스러움을 맛보기 위해서는 마음과 의지에서 살인하지 않고자 하는 거룩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차가운 말로 들리는 것은 ‘~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관점에서만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의 달콤함과 순수함과 거룩함과 신비스러움을 맛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향해 ‘~을 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에서도 묵상해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육체적이며 심적인 살인을 금하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며, 축복해야 하며, 선을 행해야하는 것까지 그 의미가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묵상자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사랑과 관용과 우애와 착한 마음과 친절과 자비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곳을 함께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향해 살인하지 않고 축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살고자 하는 거룩한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이 희망은 우리 자신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힘에서 나오는 것은 자신을 이미 거룩하고 의로운 자인 것처럼 우쭐하고 부풀어있게 만드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희망을 간구하는 겸손한 기도의 필요성을 부각시킵니다. 그에게 있어서도 묵상과 기도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묵상은 기도를 요청하며 기도로 나아갑니다. 묵상에서 기도로 나아가는 전통적인 성경읽기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이 루터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가지고 제시한 묵상의 방법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에게까지 내려온 중세의 전통과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종교개혁적인 사상이 잘 결합된 방법입니다. 이제 루터가 묵상한 내용을 가지고 기도로 나아갑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손으로는 살인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과 생각으로 수많은 살인을 하였습니다.

        남을 미워하기도 하였고,

        시기하기도 하였고,

        분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또한 눈으로도 살인을 하였습니다.

        남을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저주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입으로도 살인을 하였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저주하고 욕하며 상처 주는 말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입을 통해 나오고 있습니다.

       

        분노를 쏟아내는 말들이 제 입에서 떠나지 않나이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 제 손은 죽어가는 자들의 손을 잡지 못하며,

        제 발은 도움이 필요한 자를 향해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 이제는 살인하는 삶에서 떠나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기를 원합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옵소서.

       

        주님, 저의 신앙의 삶이

        단지 살인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단계에 머물지 않게 하옵소서.

        보다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제 눈은 이웃을 항상 선하게 바라보게 하시고,

        제 입은 칭찬과 격려와 위로의 말들이 쏟아지는

        축복의 입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도와주옵소서.

       

        제 손과 발은 실의와 절망에 빠진 자를 일으켜주며,

        이 땅의 작은 자들과 동행하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도와주옵소서.

       

        제가 거하는 모든 처소에서,

        제가 가는 모든 땅에서 더 이상 살인이 일어나지 않고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는

        하늘의 기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저의 일상에 이러한 기적이 항상 일어나

        저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거룩한 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